평산신씨

예안 문중록 재작성에 관여하게된 경위 설명

촘배 2011. 4. 23. 16:31

禮(예)安(안) 門(문)中(중)錄(록) 再(재)作成(작성)에 關與(관여) 하게 된 自初至終(자초지종) (經緯(경위)說明(설명))

 

지난 6월 末(말)頃(경)에 大宗(대종)中(중) 常任(상임) 副(부)都有司(도유사) 鉉(현)皓(호) 宗(종) (齋(재)靖(정)公(공)派(파) 孝(효)昌(창)의 次男(차남) 自(자)敬(경) 系(계)) 으로부터 電話(전화)를 받았다.

 

通話(통화)의 內容(내용)인 즉, 禮(예)安(안)門中(문중)에서 提出(제출)된 進士(진사) 公(공) (諱(휘) 自(자)恕(서)) 系(계)의 提出(제출)文(문) 內容(내용)이 좀더 補完(보완)되기 바란다는 鄭重(정중)하고도 懇曲(간곡)한 付託(부탁) 形式(형식)의 電話(전화)를 받았다.

 

그동안 大(대)宗中(종중)에서 1000年(년)史(사) 編纂(편찬) 事業(사업)을 推進(추진)한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나 自身(자신)이 別(별)로 關心(관심)을 갖지 않았던 터이라 憫惘(민망) 하기도 하고 한편 羞恥(수치)서러운 마음마저 느끼게 되였다.

 

四方(사방)으로 搜所聞(수소문) 하여 禮(예)安(안)門中(문중)에서 提出(제출)한 原本(원본)을 入手(입수)하여 檢討(검토)해본 結果(결과) 한 門中(문중)의 門中(문중)錄(록) 치고는 宗(종)事(사) 일에 門外漢(문외한)인 나 自身(자신)이 보기에도 그 內容(내용)이 몹시 未洽(미흡)하다는 것을 느꼈다.

 

暫間(잠간) 禮(예)安(안) 門中(문중)에서 齊(제)靖(정)公(공)派(파) 派(파)宗中(종중)에 提出(제출)되었던 原文(원문) 內容(내용)을 보기로 하자.

 

齊(제)靖(정)公(공)派(파) 進士(진사) 公(공) ( 諱(휘) 自(자)恕(서) ) 系(계)

주문

(64字(자))

號(호)는 遯(둔)庵(암)이며 嶺(영)外(외)로 落(낙)南(남)하여 太宗(태종) 壬午(임오) 式(식)年(년)試(시) 進士(진사)에 合格(합격)하고 벼슬은 縣監(현감)을 지내고 嶠(교)南(남)科(과)榜(방)錄(록)에 依(의)하면 禮(예)安(안)에 遁居(둔거) 하였다. 禮(예)安(안) 門中(문중)의 入(입)鄕(향)祖(조)이시다.

墓所(묘소)

(33字(자))

墓(묘)는 安東(안동)郡(군) 禮(예)安(안)面(면) 浮(부)浦(포)洞(동) 寓(우)麻(마)谷(곡) 甲(갑)卯(묘)原(원)이다.

壬辰倭亂(임진왜란) 以後(이후) 墓(묘)次(차)를 失傳(실전)하였다.

(30字(자))

世傳(세전)에 累(누)世(세)先(선)阡(천)이므로 先塋(선영)아래에 祭壇(제단)을 設(설)壇(단)하고 24位(위)를 合祀(합사)한다.

(50字(자))

世(세)阡(천)碑(비)가 있는데 興(흥)海(해)人(인) 裵(배) 東(동)煥(환)이 撰(찬)했다.

事績(사적)碑(비)는 光(광)山(산)人(인) 金(김) 澤(택)鎭(진)이 撰(찬)하고 豊(풍)山(산)人(인) 柳(유) 世(세)泳(영)이 썼다.

(21字(자))

墓(묘): 慶北(경북) 安東(안동)市(시) 禮(예)安(안)面(면) 浮(부)浦(포)洞(동) 寓(우)麻(마)谷(곡) 祭壇(제단)

配(배):

子(자): 重(중)元(원)

 

文章(문장) 全體(전체)가 總(총) 198字(자)밖에 안 되는 아주 짧은 文章(문장)으로서 마치 남의 말 하듯 記述(기술)되어 있어 禮(예)安(안)이라는 한 門中(문중)의 體身(체신)으로 보아 內容(내용)을 補完(보완)할 餘地(여지)가 多分(다분)이 있다고 느꼈다.

主文(주문)格(격)인 序文(서문) 內容(내용)조차도 不過(불과) 64字(자) 뿐이었다.

 

한편 添附(첨부)된 人物(인물)錄(록) 內容(내용)을 보면 17世(세) 重(중)元(원)으로 부터 34世(세) 瀀(우)澈(철)宗(종) 까지 總(총) 58名(명)만이 收錄(수록)되어 있었다.

 

 

世(세)阡(천)碑(비) 寫眞(사진) 說明(설명)文(문)에 禮(예)安(안)門中(문중) 世(세)阡(천)碑(비)를 安東(안동)門中(문중) 世(세)阡(천)碑(비)로 잘못 記錄(기록) 되었음을 發見(발견)함.

 

電話(전화)를 받은 날로부터 며칠 동안 禮(예)安(안)人(인)인 自己(자기) 自身(자신)이 무척 怨望(원망)스러운 錯雜(착잡)한 煩悶(번민)으로부터 해어날 수가 없었다.

 

悲慘(비참)한 心情(심정)으로 괴로워만 하던 나自身(자신)을 털고 心機一轉(심기일전)하여 門(문)事(사)에 關心(관심)을 가짐으로 禮(예)安(안) 申(신)氏(씨) 門中(문중)을 爲(위)해 남은 餘生(여생) 내가 할 일이 무엇 인지를 찾기로 決心(결심) 했다.

 

暫間(잠간) 이 機會(기회)를 빌어 그동안 나 自身(자신) 禮(예)安(안)門中(문중) 일에 對(대)한 無關心(무관심) 乃至(내지)는 門外漢(문외한)으로 아무런 도움을 드리지 못했던 事由(사유)를 以實直告(이실직고) 하고자 한다.

 

辨明(변명) 같지만 母胎(모태)로부터 基督敎(기독교) 家庭(가정)에서 자란 信仰(신앙)的(적) 感化(감화)뿐 아니라 半平生(반평생) 동안의 軍人(군인)生活(생활)과 外國(외국)勤務(근무) 等(등)의 떠돌이로 지내면서 飮(음)水(수)思(사)源(원)의 崇祖(숭조)思想(사상)과 門(문)事(사)參與(참여)에 너무나 愚鈍(우둔) 했던 것만은 事實(사실)이다.

 

나 自身(자신) 率直(솔직)히 말해서 禮(예)安(안) 門中(문중) 일에 깊이 關與(관여)하는 것이 나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을 뿐 아니라 實(실)없는 일이라는 漠然(막연)한 믿음 같은 것이 있었기에 意圖的(의도적)으로 애써 外面(외면)해 왔던 것이 率直(솔직)한 告白(고백)이다.

 

곰곰 히 生(생)覺(각)해 보면 위代(대)로부터 禮(예)安(안)에서 태어났고 禮(예)安(안)에서 자랐으며 先塋(선영)을 禮(예)安(안)에 모시고 있는 等(등) 禮(예)安(안) 없는 나란 生(생)覺(각)할 수 없는 일이다.

 

늦게 남아 80나이에 自己(자기)의 根本(근본)을 되돌아 볼 수 있는 모처럼의 貴(귀)한 機會(기회)를 만난 것 같다.

 

바로 平(평)山(산) 申(신)氏(씨) 1000年(년)史(사) 發刊(발간)에 參與(참여)할 수 있는 絶好(절호)의 때가 왔기 때문이다.

 

 

蔽(폐)一(일)言(언)하고 이번에 齊(제)靖(정)公(공)派(파) 進士(진사) 公(공) 禮(예)安(안) 門中(문중)錄(록)을 한번 써보기로 마음먹고 나름대로 門中(문중)錄(록)에 갖추어야할 內容(내용)의 重點(중점)을 愼重(신중)히 構想(구상)한 다음 必要(필요)한 各種(각종) 資料(자료)들을 蒐集(수집) 工夫(공부)하기 始作(시작)했다.

 

 

事實(사실) 門(문)事(사) 일에 無關心(무관심) 했던 이 사람이 혼자서 尨大(방대)한 關聯(관련) 資料(자료)를 涉歷(섭력)하랴 ,서투른 컴퓨터 操作(조작)으로 인터넷으로 檢索(검색)하랴 ,

登記郵便(등기우편)等(등)을 發送(발송)하랴 정말 孤軍奮鬪(고군분투) 戰鬪(전투)하듯 不撤晝夜(불철주야) 東奔西走(동분서주) 한 지난 두 달 半(반)의 時間(시간)이 아련하게 느껴질 뿐이다.

 

80이 넘은 이 나이에 이제 무슨 功名心(공명심)이나 名譽慾(명예욕)에 눈이 어두워 사서 이 苦行(고행)을 했겠습니까.

 

오로지 祖上(조상)님들 에게 不孝(불효)했던 나 自身(자신)의 지난날에 對(대)한 뼈저린 懺悔(참회)와 禮(예)安(안)門中(문중)의 自尊心(자존심) 恢復(회복)宣揚(선양)을 爲(위)해 渾身(혼신)의 精力(정력)을 쏟아 부었을 뿐이며 그以(이)上(상)도 그以(이)下(하)도 아니었습니다.

 

이번 機會(기회)에 우리 入(입)鄕(향)祖(조)에 對(대)한 確固(확고)한 믿음을 定立(정립)하여

平(평)山(산) 申(신)氏(씨) 1000年(년)史(사)에 올림으로서 禮(예)安(안) 門中(문중)의 毅然(의연)하고 健在(건재)함을 誇示(과시)해야 할 것이다. 우리 一生(일생)에 單(단) 한번 밖에 없는 前(전)無(무) 後(후)無(무)한 絶好(절호)의 이번 機會(기회)를 놓쳐서는 안 될 것이다.

이 길 만이 祖上(조상)들에 報恩(보은)하는 길이요 우리 後孫(후손)들에 對(대)한 마땅한 道理(도리)라 生(생)覺(각) 한다.

 

찍이 7월 14일 모임에서 大(대)宗中(종중)에 提出(제출)할 門中(문중)錄(록)을 最終的(최종적)으로 다시 作成(작성)할 것을 前提(전제)로 文案(문안)의 基本(기본)方向(방향), 즉 分明(분명)한 落鄕(낙향)動機(동기). 落鄕(낙향)地(지) 禮(예)安(안) 選擇(선택)의 事由(사유) 等(등)을 克明(극명)하게 記述(기술)하고 後孫(후손)들의 位相(위상)을 誇示(과시)하는 門中(문중)錄(록)을 作成(작성)하도록 合意(합의)하고 禮(예)安(안) 錫(석)圭(규) 宗(종)賢(현)에게 委託(위탁) 金(김) 九(구)鉉(현) 先生(선생)의 글을 받아 온 것이 그 全部(전부)이다.

 

한가지 卑近(비근)한 例(예)를 들자면 禮(예)安(안) 門中(문중)錄(록) 作成(작성)에 必要(필요)한 “指針書(지침서)” ( 別添(별첨) 2010. 7. 17日字(일자) 齊(제)靖(정)公(공)派(파) 進士(진사) 公(공) 諱(휘) 自(자)恕(서) 系(계) 의 草本(초본)) 을 주고 錫(석)圭(규) 宗(종)에게 付託(부탁)하여 漢(한) 學者(학자)이신 光(광)山(산)人(인)金(김) 九(구)鉉(현) 先生(선생)으로 하여금 撰文(찬문)을 써서 받았다.

 

內容(내용)은 나무랄 데 없는 아주 훌륭한 文章(문장)이 엇으나 漢字(한자)가 많아 한글 世代(세대)의 後孫(후손)들이 읽기 쉽도록 國漢文(국한문) 混用(혼용)文(문)으로 바꾸어 달라고 最初(최초) 起案(기안)者(자)이신 金(김) 先生(선생)에게 付託(부탁)했다. 우리가 直接(직접) 못 할 바는 아니었지 만 最初(최초) 起草(기초)한 분에 對(대)한 禮儀(예의)를 尊重(존중)했기 때문 이였다.

 

우리 門中(문중)은 長長(장장) 600餘年(여년)의 長久(장구)한 時日(시일)동안 禮(예)安(안)門中(문중) 일에 對(대)하여 對外的(대외적)으로 每事(매사) 意氣銷沈(의기소침)하여 小心(소심)했던 作態(작태)를 이번 機會(기회)에 果敢(과감)히 떨쳐 버리고 밝은 光明(광명)世上(세상)에서 어떤 他(타) 門中(문중)에도 뒤지지 않는 떳떳하고 빛나는 門中(문중)으로 거듭 날수 다시없는 이번 機會(기회)를 놓치지 맙시다.

 

 

새로 쓰는 禮(예)安(안) 門中(문중)錄(록)에 아래 세 가지를 條理(조리) 있게 記述(기술)하기로 作心(작심)함..

 

1, 落鄕(낙향)動機(동기) 明記(명기) (遁(둔)居(거)削除(삭제)) (隱居(은거)로 代置(대치))

2, 落鄕(낙향)地(지) 選擇(선택) 說明(설명)

3, 後孫(후손) 繁榮(번영) 誇示(과시)

 

門(문)錄(록) 作成(작성)의 原則(원칙)

 

入(입)鄕(향)祖(조) 어른을 爲(위)해서는

 

1. 孤高(고고)한 氣象(기상)을 强調(강조)할 時(시) 忠(충)과 孝(효)가 相馳(상치)될 境遇(경우) 先親(선친)을 卑下(비하)하는 缺禮(결례)를 自制(자제)한다.

 

2. 他(타) 宗中(종중)에 秋毫(추호)라도 累(누)를 끼침으로 物議(물의)를 惹起(야기)하는 일이 없도록 한다.

 

3. 史實(사실) 引用(인용)時(시) 出處(출처) 根據(근거)가 分明(분명)해야 하며 모든 表現(표현)은 婉曲(완곡)하고 格調(격조) 높게 記述(기술) 한다.

 

 

後孫(후손)들을 爲(위)해서는

 

1. 家門(가문)을 빛낸 人物(인물)을 記錄(기록)할 땐 漏落(누락)되는 人士(인사)가없도록 愼重(신중)을 期(기) 한다.

 

2. 擧(거)名(명)人士(인사) 數(수)는 多多益善(다다익선) 이기는 하나 過猶不及(과유불급)이라는 兩面(양면)을 잘 調和(조화) 시킨다.

 

 

在京(재경) 禮(예)安(안) 宗(종)員(원)들을 召集(소집) 提出(제출)文(문) 再(재) 作成(작성)의 必要性(필요성)에 共感(공감)하고 아래와 같은 세 가지 內容(내용)을 明示(명시)하기로 合意(합의)함.

 

1. 入(입)鄕(향)祖(조) (諱(휘) 自(자)恕(서)) 의 落鄕(낙향) 眞實(진실)을 明記(명기)하자

 

避身(피신)이냐?滅門之禍(멸문지화)를 避(피)하기 爲(위)하여 몸을 숨김

隱身(은신)이냐?" " " " " " " " "

避難(피난)이냐?" " " " " " "

逃避(도피)냐? " " " "

 

遯(둔)居(거)냐?돈(遁(둔) ,遯(둔))자의 뜻 (달아날 돈) (숨을 둔) (回避(회피)할 돈)

遁(둔)居(거)냐?숨어서 산다는 뜻으로 쓰임 (國語(국어)大(대)辭典(사전) 參照(참조))

隱居(은거)냐?어지러운 世上(세상)을 避(피)하여 숨어서 삶 (國語(국어)大(대)辭典(사전) 參照(참조))

※官職(관직)을 물러나서 閑居(한거)함 이라는 뜻 ( 國語(국어)大(대)辭典(사전) 參照(참조) )

 

隱居(은거)라는 한 미디 表現(표현)으로 避身(피신)隱身(은신)避難(피난)逃避(도피)도 아닌 官職(관직)을 물러나서 閑居(한거) 한다는結論(결론)으로 確定(확정) 지어야 한다.

 

嶠(교)南(남)科(과)榜(방)錄(록)에는 居(거) 禮(예)安(안)으로 分明(분명)히 記錄(기록)되어 있음에도 禮(예)安(안) 門中(문중)에서는 오래전부터 遁居(둔거)( 숨어서 산다는) 라는 表現(표현)을 固執(고집)해 왔음.

 

 

 

落鄕(낙향)서울에서 시골로 옮김 ( 國語(국어) 大(대)辭典(사전) 參照(참조) )

入(입)鄕(향)辭典(사전)에 없는 말

歸鄕(귀향)故鄕(고향)으로 돌아 옴

出鄕(출향)고향을 떠남

故鄕(고향) 자기가 태어나고 자라난 고장

本鄕(본향) 본디의 고향. 시조가 난 땅

望鄕(망향) 고향을 그리고 생각함

失鄕(실향) 고향을 잃음. 고향에 돌아갈 길을 잃음

同鄕(동향) 같은 고향

結論的(결론적)으로 落鄕(낙향)動機(동기) 說明(설명)을 아래와 같이 하기로 合意(합의)함

 

苛酷(가혹)한 온갖 政變(정변) (易姓(역성)革命(혁명), 杜(두)門(문)洞(동) 事件(사건), 王子(왕자)의 亂(난), 趙(조) 思(사)義(의)의 亂(난) 等(등) )에 對(대)한 悲憤慷慨(비분강개)의 心情(심정)으로 벼슬을 버리고 落鄕(낙향) 하신 것으로 表記(표기)하기로 合意(합의)함.

 

2. 禮(예)安(안)을 落鄕(낙향) (서울에서 시골로 옮김) 地(지)로 擇(택)한 緣由(연유)에 對(대)한 合理的(합리적) 이고 論理的(논리적)인 說明(설명)을 하자.

 

全國(전국) 八道(팔도) 江山(강산)안 에서 禮(예)安(안)으로 定着(정착)하게 된 理由(이유)

 

外家(외가) (安東(안동)金(김)氏(씨)) 의 緣故地(연고지)

山紫水明(산자수명)한 名勝地(명승지) (淸(청)凉(량)山(산) 洛東江(낙동강))

선비 文化(문화)의 中心(중심)地(지)

世塵(세진)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

 

3. 禮(예)安(안) 門中(문중)의 처음은 微弱(미약)하였으나 나중 (近世(근세)) 에 이르러 昌盛(창성)한 家門(가문)됨을 誇示(과시) 하자

後(후) 記(기)

先祖(선조)들에 對(대)한 考證(고증) 資料(자료)의 未備(미비)로 내세울 것도 없지만 解明(해명)하거나 숨길만한 內容(내용)도 없다.

 

다만 그냥 덮고 넘어가기로 한 대목은

1. 嶠(교)南(남)科(과)榜(방)錄(록)에 記錄(기록)된 自(자)恕(서) 어른의 生(생) 丙辰(병진)이라는 出生(출생)年度(년도) ( 1376年(년) )를 그대로 引用(인용)하면 孝(효)昌(창) 派(파)祖(조)어른의 出生(출생)年度(년도) (1364年(년))와 比較(비교)할 때 派(파)祖(조)어른이 12歲(세)때 出生(출생) 한 것으로 됨으로 父親(부친) 出生(출생)日(일)을 尊重(존중)하는 意味(의미)에서 入(입)鄕(향)祖(조)의 生年月日(생년월일)은 덮고 넘어가기로 함.

 

2. 禮(예)安(안) 門中(문중)에서 派(파)宗中(종중)에 提出(제출)한 原文(원문) 가운데 進士(진사)에 合格(합격)한 時期(시기)를 壬午(임오) (1402年(년)) 式(식)年(년)試(시)를 引用(인용)하였는데 序頭(서두)에 記述(기술)하기를 嶺(영)外(외)로 落(낙)南(남)하여 라고 되어있어 壬午(임오)年(년) 以前(이전)에 落南(낙남)한 것으로 되며 落鄕(낙향)한 處地(처지)에 科擧(과거)에 應試(응시) 合格(합격)後(후) 縣監(현감)까지 지냈다는 記錄(기록)이 理解(이해)하기 어려움으로 새로 作成(작성)할 禮(예)安(안) 門中(문중)錄(록) 에는 落鄕(낙향)前(전)의 壬午(임오)年(년)에 進士(진사)에 合格(합격)하고 縣監(현감) 職(직)에 올라 奉職(봉직) 중 뜻하는바 있어 벼슬자리를 내놓고 禮(예)安(안)으로 落鄕(낙향) 하셨다는 手順(수순)으로 整理(정리)하는 것이 가장 合理的(합리적)이고 順理的(순리적)이라 본다.

 

特(특)히, 派(파)祖(조)어른 및 3兄弟(형제)분들과도 年(연)次(차)上(상) 別(별) 摩擦(마찰) 없는 圓滿(원만)한 흐름으로 마무리 될 것으로 判斷(판단)함.

入(입)鄕(향) 祖(조) 어른에 對(대)한 믿음을 아래와 같이 定立(정립)하고자 한다.

 

進士(진사)에 及第(급제) 하고

縣監(현감)으로 奉職(봉직) 하고

官職(관직)에서 辭退(사퇴) 하고

禮(예)安(안)으로 落鄕(낙향)함으로

 

3. 壬辰倭亂(임진왜란)으로 墓(묘)次(차)를 失傳(실전)하여 24位(위)를 合祀(합사)했다는 部分(부분)은 寫眞(사진)으로만 代置(대치)하고 苟且(구차)한 記述(기술)을 省略(생략)하기로 함.

 

勞心焦思(노심초사) 끝에 이끌어낸 結論(결론)을 이번 機會(기회)에 禮(예)安(안)門中(문중)의 入(입)鄕(향)祖(조)에 對(대)한 確固(확고)한 믿음으로 굳힐 것이며 1000年(년)史(사) 에 올림으로서 禮(예)安(안)門中(문중)의 毅然(의연) 健在(건재)함을 誇示(과시) 해야 할 줄로 確信(확신)한다.

이것이야 말로 祖上(조상)들에 對(대)한 報恩(보은)이요 우리 自身(자신)과 後孫(후손)들을 爲(위)한 마땅한 道理(도리)라 믿는다.

 

 

電話(전화)通話(통화)의 原點(원점)으로 돌아가 공곰히 生(생)覺(각)해 보건데

우리 禮(예)安(안) 門中(문중)에 對(대)한 걱정은 고마우나 그 眞意(진의)가 果然(과연) 무엇인지 다시 한번 苦悶(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齊(제)靖(정)公(공)派(파) 內部(내부)의 다른 門中(문중)의 或者(혹자)는 孝(효)昌(창) 어른의 4兄弟(형제) 中(중) 넷째 自(자)恕(서) 禮(예)安(안)門中(문중)에 對(대)하여 別(별)로 시답지 않게 치부하고 慇懃(은근)히 업신여겨 온 것만도 事實(사실)이다.

 

윗代(대) 齊(제)靖(정)公(공) 어른 事蹟(사적)資料(자료)中(중)에 넷째 아들 自(자)恕(서) 어른의 諱(휘)啣(함)이 더러 빠진 적이 있는 것이 정말 안타가운 事實(사실)이다. 옛날은 말할 것도 없이 甚至於(심지어) 1998 年(년)에 發刊(발간)된 平(평)山(산) 申(신)氏(씨) 人物(인물)錄(록)의 始祖(시조) 略傳(약전)中(중) 齊(제)靖(정)公(공)派(파) 欄(난)에 兄弟(형제) 세분 이름 만 있고 넷째 어른의 諱(휘)啣(함)이 없는 無顔(무안)한 일도 제대로 챙기지 못한 門中(문중) 어른들을 怨望(원망) 하고 싶다.

 

莫上(막상) 금번 平(평)山(산) 申(신)氏(씨) 1000年(년)史(사) 編纂(편찬) 事業(사업)에 즈음하여 18個(개) 他(타) 門中(문중)과 견주게 될 形便(형편)이 되고 보니 齊(제)靖(정)公(공)派(파) 全體(전체)의 威勢(위세) 誇示(과시)에 負擔(부담)이 되는 禮(예)安(안)門中(문중)의 奮發(분발)을 促求(촉구)하는 모양세로 바뀐 것 같아 부끄러움으로 하늘이 무너지는 心情(심정)이 었다.

 

名色(명색)이 大(대)宗中(종중)의 顧問(고문)이라는 體面(체면)에 그 동안 宗(종)事(사)에 너무나 無關心(무관심)했던 自身(자신)이 後悔(후회)스러웠고 부끄럽게 生(생)覺(각)되었다.

 

大(대)宗中(종중) 元老(원로) 懇談會(간담회) ( 꼭 한번 읽어 보세요)

 

지난 9월10일 大(대)宗中(종중) 都有司(도유사) 招請(초청)으로 5名(명)의 顧問(고문), 常任(상임) 副(부)都有司(도유사)가 參席(참석)한 자리에서 1000年(년)史(사) 編輯(편집) 總(총)責任者(책임자)인 光(광)淳(순)宗(종)으로 부터 그동안의 進行(진행) 狀況(상황)에 對(대)한 說明(설명)을 듣고 意見(의견)交換(교환)을 하는 자리가 마련 되었었다.

 

前半(전반)部(부) 說明(설명)이 끝난 다음 전혀 議題(의제)와는 無關(무관)한 齊(제)靖(정)公(공) 派(파)中(중)에서 問題(문제) 삼았던 禮(예)安(안) 門中(문중)에서 提出(제출)한 自(자)恕(서) 系(계) 原文(원문)이 添附(첨부) 된 것을 보고 啞然失色(아연실색) 하여 他(타)門中(문중) 사람들 앞에 公開(공개) 된다면 집안 亡身(망신)이라 生(생)覺(각)되어 論議(논의) 없이 간신히 넘기느라 진땀을 뺐다.

 

누가 果然(과연) 이런 장난질을 했는지는 斟酌(짐작)은 되나 그 자리에서 是是非非(시시비비)를 따질 形便(형편)이 못됨으로 애써 그대로 넘겨 危機(위기)만을 冒(모)免(면)하기에 汲汲(급급)했다.

 

事實(사실)인 즉 禮(예)安(안) 門中(문중)에서 提出(제출)된 原文(원문) 그대로 이기 때문에 꼼짝없이 창피를 당할 뻔 했으나 그대로 넘어간 것이 그나마 不幸(불행) 中(중) 多幸(다행)한 일이었다.

 

禮(예)安(안) 門中(문중)에서 提出(제출)된 原文(원문) 앞에 15世(세) 孝(효)昌(창) 公(공)의 神(신)道(도)碑(비) 寫眞(사진)을 첫머리에 붙여놓고 孝(효)昌(창) 어른에 關(관)한 張皇(장황)한 事績(사적)文(문)이 실려 있었다.

 

그 內容(내용) 가운데 發見(발견)해낸 너무나 부끄러운 事實(사실) 몇 가지를 적어본다.

 

1. 派(파)祖(조) 孝(효)昌(창)어른 資料(자료) 引用(인용)文(문) 中(중) 에 두 차례나 4兄弟(형제)中(중) 3兄弟(형제)까지만 擧(거)名(명)되고 넷째 아들인 禮(예)安(안) 入(입)鄕(향)祖(조) 自(자)恕(서) 어른의 이름이 빠져 있는 기막힌 일이 있었다.

 

2. 맨 끝머리에 적힌 卒(졸). 墓(묘). 配(배) 다음 子(자)欄(란)에 간신히 3兄弟(형제) 이름 다음에 4男(남) 自(자)恕(서)라고 적혀 있어 그나마 한숨을 돌렸다.

 

또 한 가지 낯 뜨거운 일 中(중)의 하나는 19個(개) 派(파)宗中(종중)의 派(파)別(별) 入(입)錄(록) 名祖(명조) 整理(정리) 現況(현황)表(표)에 惟獨(유독) 齊(제)靖(정)公(공)派(파)의 備考欄(비고란)에만 未完成(미완성)이라 적혀 있는 것 을 보고 禮(예)安(안)門中(문중)錄(록)의 未(미)提出(제출) 事實(사실)을 꼬집어 表示(표시)한 것 같아 俗談(속담)에 도둑이 제발 저리다는 식으로 이사람 혼자 마음속으로 눈물을 삼켰다.

 

3. 寓(우)麻(마)谷(곡)에 모셔진 24位(위)의 合祀(합사)墓域(묘역) 寫眞(사진)에다 괄시 당한 64字(자)로 된 禮(예)安(안) 門中(문중)錄(록)의 짤막한 글을 對(대)할 때 정말 참기 힘든 羞恥(수치)感(감)에 치가 떨렸다.

그 날 點心(점심)食事(식사)는 意圖的(의도적)으로 禮(예)安(안) 門中(문중)을 들먹거리는 意圖(의도)와 出處(출처)가 어디인지 苦悶(고민)하느라 食慾(식욕) 마저 잃어 버렸다.

 

 

 

 

 

 

 

 

 

 

他(타) 門中(문중)으로부터 퇴짜 맞은 門中(문중)錄(록)에 對(대)한 부끄러움을 삼키며

提出(제출) 磨勘(마감) 날자 마저 促迫(촉박)하여 躁急(조급)한 나머지 일 進行(진행)의 節次(절차)上(상) 未備(미비)하고 잘못된 아쉬움들을 남긴點(점) 未安(미안)하게 生(생)覺(각) 합니다. 너그러운 理解(이해)를 바랍니다.

 

張皇(장황)한 글을 이만 줄이려 합니다.

그동안 이번일로 애써주신 命(명)俊(준) 都有司(도유사)와 鉉(현)東(동) 서울 宗親會(종친회)長(장)을 비롯한 모든 宗(종)賢(현) 여러분들의 協助(협조)와 特別(특별)히 門中(문중)錄(록) 作成(작성)에 積極(적극) 參與(참여)해주신 禮(예)安(안) 錫(석)圭(규)宗(종)賢(현)과 서울의 昌(창)淳(순), 東(동)基(기)宗(종)에게 感謝(감사)를 드립니다. 아울러 撰(찬)文(문)을 써주신 金(김) 九(구)鉉(현) 先生(선생)에게도 禮(예)安(안)門中(문중)을 代身(대신)하여 甚深(심심) 한 感謝(감사)를 드립니다.

 

끝까지 읽어주신 禮(예)安(안) 宗(종)賢(현) 여러분에게 도 感謝(감사)를 드립니다.

 

새로 만든 禮(예)安(안) 門中(문중)錄(록)의 자랑을 가슴에 안고 크게 더 크게 활짝 웃어 봅시다.

子息(자식)들에게 우리 門中(문중)의 멋지고 눈물겨운 來歷(내력)들을 가르쳐 자랑스러운 名譽(명예)와 矜持(긍지)를 심어 줍시다.

 

우리 禮(예)安(안) 平(평)山(산)申(신)氏(씨) 門中(문중) 萬歲(만세) ! 萬歲(만세) ! 또 萬歲(만세) ! ! ! !

 

2010. 9. 20 아침 33世(세) 鉉(현) 銖(수)

진작 宗(종)員(원) 가운데 그 누구든지 關心(관심)있고 能力(능력)있는 분이 門中(문중)錄(록) 全文(전문)을 쓰던지 다 된 文案(문안)에 對(대)한 字句(자구) 校訂(교정)에나 協助(협조)하는 程度(정도)가 마땅하거늘 이미 7월 17일에 作成(작성)된 禮(예)安(안) 門中(문중)錄(록) 原文(원문)을 난데없이 한 달하고도 닷 세나 지난 8월 22日字(일자)에 마치 自己(자기)가 編輯(편집) 했다는 式(식)으로 나서는 것은 到底(도저)히 理解(이해) 할 수 없는 일이다.

起草(기초)한 사람의 要請(요청)이나 諒解(양해) 없이 남의 글에 함부로 손을 댄다는 것은 常識(상식)과 禮法(예법)에 어긋나는 일이다. 정말 可笑(가소)로운 일 은 編輯(편집)과 校訂(교정)의 本質(본질) 조차 區別(구별) 못 하는 作者(작자)가 남의 글을 編輯(편집) 했다는 말은 곧 남의 글을 剽竊(표절)했다는 뜻이 될 수 있는 것이다.

 

 

禮(예)安(안) 申(신)家(가)들이 무슨 有勢(유세)로 이렇게 까지 磨勘(마감) 時日(시일)을 끌어서 온 宗中(종중)의 비웃음 꺼리가 되어야 하는지 정말 억장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지난 달 30日(일) 合同會議(합동회의)에서 結末(결말)이 났다면 이런 狼狽(낭패)는 없었을 것이라 生(생)覺(각) 하니 정말 憤(분)을 삭히기 힘들었다.

 

 

정말 記憶(기억)하고 싶지도 않은 지난 8월 30일 禮(예)安(안)과 서울의 合同(합동) 最終(최종) 마무리 會議(회의)場(장)에서 빚어진 아무 名分(명분)도 理由(이유)도 없는 衆口難防(중구난방)의 敵前(적전) 自(자)中(중)之(지)亂(난)의 모습을 보고 아직도 精神(정신) 차리지 못한 우리 禮(예)安(안)門中(문중)들의 못난 自畵像(자화상)을 보는 것 같아 自嘲(자조)의 冷笑(냉소)를 禁(금)치 못 했다.

 

重大(중대)하고도 嚴肅(엄숙)해야 할 門中(문중)의 重大(중대)事(사)를 앞두고 한 두 사람의 엉뚱한 妄發(망발)로 根本(근본)을 뒤 흔든 일은 百拜(백배) 謝罪(사죄)해도 容恕(용서) 받을 수 없는 事件(사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