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문점에서 바라 본 한국 혹은 남조선
북한 여행 첫째 날에는 하루종일 기차를 타고 밤에는 평양에서 아리랑을 관람했다. 우리는 밤 10시쯤 호텔에 도착해 저녁을 먹을 수 있었다.
다음날 아침 6시쯤 호텔의 모닝콜 소리에 잠이 깼다. 두 시 간 동안 관광버스를 타고 판문점에 도착했다. 버스에서는 북한의 가이드가 학교 수업만큼이나 열심히 설명했지만 우리는 모두 잠을 자버렸다.
시멘트로 만든 중앙선을 건너가면 바로 한국이다. 판문점에 오니 '一步之&-#36965;(엎어지면 코 닿을 정도로 가깝다)'라는 말이 실감이 났다. 아! 그런데 북한에서는 '한국'이라는 명칭 대신 '남조선'이라고 말해야 한다.
관광객은 이쪽 문을 통해서 건물에 들어간다. 이 건물에 들어가면 분계선의 제한을 거의 느낄 수 없다.
긴 세월이 지나면서 분계선 양쪽에 있는 사람들간 세계를 보는 시각에 얼마나 차이가 생겼을지 궁금했다.
건너편은 바로 한국이다. 안내를 맡고 있는 인민군 장교는 "오늘은 관광객이 없어서 저쪽(한국 측)의 군인이 없다"고 설명했다.
중국 관광 책임자가 "높은 계급의 장교만 관광객에게 설명해줄 수 있는 권한이 있다. 일반 북한 군인은 관광객과의 접촉이 금지된다"고 설명해 줬다. 그리고 북한의 가이드가 북한 인민군의 계급장을 설명해주기도 했지만 나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이 배지는(김일성 배지) 바로 북한사람과 외국인을 구별될 수 있는 상징이며 (북한 사람들의) 명예라고 할 수 있다. 모두 북한 사람의 가슴 앞에는 이 배지가 꼭 걸려 있다. 김일성 외에도 김정일의 얼굴이 있는 배지도 있다.
김일성 배지 밑에 있는 포장은 명예포장, 그리고 훈련모범포장, 사격모범포장 등이다.
이 북한 장교는 전형적인 북한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장교는 우리에게 휴전회담의 과정을 매우 흥분된 어조로 설명했다. 몰론 그가 배웠던 역사가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와는 완전히 다르지만 누가 역사의 진실을 알 수 있을 것인가?
◆세계에서 제일 깊은 평양지하철
평양 지하철은 세계에서 제일 깊은 지하철이다. 이 지하철은 전쟁에 대비하기 위해 땅 속 깊이 만들어진 것이다. 북한의 가이드는 이 지하철의 깊이는 100미터 정도이고, 외국인은 한 정거장만 탈 수 있다고 설명했다.
지하철 건물에 들어선 후 긴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오랜 시간 밑으로 내려갔다. 위에서 내려다 보니 아래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이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아래까지 도착하는데는 최소 2분정도 소요되는 것 같았다. 지하철역 안에는 에어컨이 없지만 서늘한 느낌이 들었다.
에스컬레이터를 탔을 때 옆에는 북한 음악을 방송하는 스피커가 있었다. 평소에 북한 뉴스도 나오기는 하지만 우리는 한 마디도 알아듣지 못했다.
평양 지하철은 1968년쯤 중국의 원조를 받아 만들어졌다. 그래서인지 지하철을 탔을 때 옛날의 베이징 지하철과 비슷한 느낌이 들었다. 몇십 년 전에 만들어진 것이어서 그런지 노후돼 보였다.
지하철 승강장 양쪽에는 큰 벽화가 있다.
열차 칸에 들어가자마자 두 사람이(김일성, 김정일) 내 눈앞에 나타났다. 우리는 첫 번째 열차 칸에 들어갔다. 평양 지하철의 열차 칸은 서로 연결되어 있지 않다. 우리가 타고 있는 열차 칸 안에는 외국인 관광객밖에 없었다. 아마 일반 북한사람을 우리와 함께 타지 못하게 하려는 것 같았다. 우리가 이 열차 칸에서 내리자마자 일반 시민이 바로 이 열차 칸에 들어갔다.
지하철 역에서 나오니 평양 지하철 마크가 보였다. 옆에는 일반 시민들이 살고 있는 빌딩이 서 있었다.
'69 중학교'는 평양시에 위치한 예술 전문 학교다. 북한 가이드의 말에 따르면 이 학교는 1969년 6월 9일에 세워졌다고 한다. 학교 이름의 의미를 그때서야 알 수 있었다. 평양시에서는 주요 도로도 천리마대로, 승리대로, 영광대로 등 북한이 의미있다고 생각하는 이름으로 불리었다.
학교에 들어서자마자 김일성과 김정일이 자애로운 미소를 지으며 웃고 있는 그림을 볼 수 있었다. 옆에 있는 선풍기는 그림을 향해 있었다. 북한에서는 호텔, 박물관, 관광지 등에서 그림을 향해 있는 선풍기를 많이 볼 수 있었다. 이유는 더운 날씨에 그림이 손상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공연 직전에 강당에 선 여학생들의 모습이다. 학생들 나이가 아직 어린 것 같았다. 북한의 여자 아이들은 피부가 너무 곱고, 얼굴도 참 예뻤다.
여학생의 악기 연주 실력이 굉장히 훌륭했다. 북한 가이드는 "이 곳의 교육방식은 중학생이 적어도 하나의 예술은 전공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라며 "특히 여기에 있는 아이들은 악기 연주나 노래 부르기를 최근에서야 배우기 시작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관객석이 무대에서 너무 멀고, 무대 조명도 제대로 설치되지 않은 것 같았다. 학생들의 무대가 너무 멋있어서 사진으로 남기고 싶은 마음이 컸지만 아무리 사진기를 가까이 대도 원하는 사진을 찍을 수는 없었다. 학생들과 같이 사진을 찍을 때는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흐르기도 했다. 아이들의 순진한 얼굴을 보니 마음이 더 답답해졌다.
노래를 부르는 아이들의 나이는 어렸지만, 이들이 부르는 노래는 정치적 의미가 있는 선전 노래였다.
아래 사진의 두 여학생은 "공산당이 없으면 신 중국도 없다"(&-#27809;有共&-#20135;&-#20826;就&-#27809;有新中&-#22269;)"는 노래를 부르고 있다. 이 노래는 전에 북한 아리랑에서도 들어본 적이 있다.
무대 뒤에서 공연 중인 여학생을 재미있게 쳐다보고 있는 여학생을 봤다. 자연스러운 저 표정이 바로 저 나이의 여학생들이 지어야 할 표정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린 학생들은 기타나 아코디언 등 각종 연주를 해냈다. 갑판원을 연기하는 아이들의 표정은 그 나이 때의 아이들이 지을 수 없는 표정이었다.
공연이 끝난 후에 학생들은 무대에서 내려와 관광객들과 같이 손을 흔들며 춤을 추었다. 나는 그냥 사진을 찍고 싶었지만 한 학생이 내 손을 잡고 사람들 속으로 끌고 들어갔다.
행사가 끝난 후에 아이들은 줄을 서서 관광객들과 같이 기념촬영을 했다. 이 학생들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외국 관광객들이 매일 방문을 해서인지, 이들은 카메라 앞에서도 자신감 있는 표정을 지었다.
관광객들은 학생들에게 준비해 온 간식이나 문방구를 선물로 줬다. 우리는 직접 학생들의 손에 선물을 올려 놨지만 학생들은 선물을 보지 않은 채 전혀 모르는 일이라는 듯 계속 미소만 띠고 있었다. 아이들을 위해 더 좋은 선물을 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다양한 선물이 끊임없이 학생들의 손에 쥐어졌다. 모든 학생들이 손에 한아름 선물을 가질 수 있었다. 그렇지만 우리가 나간 뒤에는 받은 선물을 선생님에게 다시 돌려 주어야 할 것이다. 선생님은 공산주의 방식으로 모든 선물을 똑같이 학생들에게 나눠줄 것이다.
이 연필은 내가 주는 선물이었다. 어차피 담임선생님이 다시 분배를 할테니까 굳이 나누지 않고 한 학생에게만 줬다.
북한 가이드가 계속 우리를 재촉하는 바람에 아쉽지만 자리를 뜰 수 밖에 없었다. 학생들은 이미 일렬로 줄을 서서 우리에게 손을 흔들며 배웅하고 있었다. 계속 웃음을 띠고 있는 아이들의 모습을 보고 있으려니 마음이 너무 아팠다.
공연히 끝난 후 학교도 돌아볼 수 있었다. 교실은 별로 크지 않았고 30여명 정도 앉아서 수업 받을 수 있는 정도였다. 최근에 영어 수업을 시작했다는 가이드의 말에 "다른 외국어도 있는데 하필 왜 영어 공부를 하느냐"고 물으니 당황한 채 제대로 답을 하지 못했다.
북한은 11년제 의무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북한 가이드는 대학교 입학률이 30% 정도 된다고 설명해줬다.
그리고 평양에서 생활할 수 있는 사람은 모두 대학 졸업의 학력이 있다고 들었다. 또 외국인 관광객을 직접 만날 수 있는 관광 가이드가 되려면 좋은 가정 배경이나 대학 졸업의 학력이 있어야 한다고 한다.
북한에는 대외 관광여행사가 한 곳 밖에 없다. 중국어를 책임지고 있는 가이드는 40여명 정도 있고, 이 외에도 일본어, 영어, 스페인어, 러시아어 가이드가 있기 하지만 숫자가 중국어만큼 많지는 않다.
평양에서 돌아온 뒤 주변 사람들과 북한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하게 됐다. 그런데 자세히 대화를 할수록 서로의 여행 내용이 거의 비슷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왜냐하면 모든 여행 코스는 북한측이 결정해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어디로 갈 것인지, 언제 출발하는지, 몇 시간 동안 돌아볼 것인지, 심지어 어느 안내원·군인을 만나게 될지조차도 이미 다 정해져 있었다.
북한에 직접 와서 보지 않았다면 북한의 실제적인 모습을 영원히 알 수 없었을 것이다. 위 사진은 김일성광장을 청소하&-#65533; 있는 소년단 대원들이다.
미국 간첩선 푸에블로호 안에 있던 해군병사다. 안내원이 흥분된 어조로 설명을 하고 있을 때 옆에 있는 해군병사가 우리를 계속 감시하고 있었다. 그의 눈빛은 판문점에 있는 군인들과 비슷했다. 나이 어린 군인의 경계심 강한 눈빛이 정말 인상적이었다.
이 여군은 원래 우리를 맡았던 안내원을 대신해 나왔다. 원래의 안내원은 북한 광복절 행사 때문에 휴일을 보내러 갔다고 한다. 그런데 북한 가이드가 "그 안내원은 원래 이 간첩선을 노획한 영웅 중의 한 명이었다"고 말해줬다.
북한 사람들은 이 간첩선을 자주 찾는다고 한다. 이 간첩선은 1968년 미국군으로부터 노획한 것이다. 안내원은 우리한테 한 시간 넘게 미 제국주의의 침략 및 용감한 인민군의 활약에 대해 설명했다. 이 간첩선이 너무 생생한 교재였기 때문인지 안내원 스스로 자아도취에 빠진 듯했다.
개성에서 버스를 탔을 때 찍은 사진이다. 평양시를 제외하고 북한의 다른 도시들에서는 자전거가 주요한 교통수단이다.
북한 시골의 여성들은 평양 여성들하고 큰 차이가 났다. 개성에서 우연히 훌라후프를 들고 있는 여성들을 찍은 사진이다. 그들은 어떤 연습을 끝내고 돌아오는 중인 것 같았다. 내가 어렸을 때 중국에서도 이 훌라후프가 유행했었다.
인민대학습당 광장 앞에서 꽃을 파는 북한 여성을 봤다, 다음 여행 코스가 김일성 광장이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여기서 꽃을 샀다.
북한 사람들이 김일성 광장에 있는 김일성 동상 앞에서 참배를 하고 있다.
보현사(평안북도 향산군)의 안내원이다. 나는 그에게 북한의 불교 건축에 대해 질문했다. 이어서 "북한에서 불교를 믿는 사람이 있느냐"고 물었더니, 그 안내원은 "북한에도 불교를 믿는 사람이 있다"고 대답했다. 내가 또 "그러면 왜 지금 여기에는 북한 주민이 한 명도 안 보이냐"고 다시 물었더니 "점심시간이 끝난 후에는 사람이 있을 것"이라고 설명해줬다.
이 외에도 "불교 신자는 북한 인구중에서 어느 정도 비율을 차지하고 있느냐"고 질문했더니 "북한에는 불교 신도가 없는 것이 아니다. 다만 우리 모두는 주체사상을 믿는 것"이라는 알아듣기 어려운 대답을 내놨다.
군사박물관을 참관했을 때는 이 여군이 안내원 역할을 했다.
극장으로 추정되는 건물 앞에 서 있는 여학생들 모습이다.
평양의 교통경찰은 다 여성이었고, 또 모두 얼굴이 매우 아름다웠다. 북한 가이드는 "북한의 운전기사가 다 남자이니까 교통경찰은 다 여자"라면서 "남성 운전기사들은 여자 교통경찰의 지휘를 잘 따른다"고 설명했다.
이 사진은 버스에서 몰래 찍은 사진이다. 이 남성은 북한 사람들이 주로 입는 옷을 입고 있었다. 이 옷차림은 북한에서 매우 유행하고 있었다.
묘향산국제친선전람관에서 만났던 학생들이다. 여학생들의 교복이 너무 예쁘게 보였다. 하얀색 블라우스가 파란색 치마와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만약에 중국의 감독들이 복고풍 영화를 찍으려면 여기에 와서 촬영을 해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 세계에서 정치표어가 제일 많은 국가
이 사진들은 관광버스에서 찍은 사진들이다. 그래서 어떤 부분의 표어는 완전히 찍지 못했다. 북한은 아마 세계에서 가장 많은 표어가 있는 국가일 것이다. 길거리에는 여러 양식의 표어와 선전문구가 보였다. 중국에도 비슷한 시기가 있었겠지만, 나는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했다.
북한은 정말 신기한 곳이다. 지금은 이미 북한에 갔다 왔지만, 그 전부터 꼭 북한에 가보고 싶었다. 개인적 호기심 때문이기도 했지만 부모님 세대가 살아왔던 환경이 궁금하기도 했다.
단조로운 도시건물과 특이한 색채로 표현된 다양한 표어들이 의의로 잘 어울렸다.
위 사진에 있는 표어는 만경대 생가(生家)를 뜻하는 것 같다.
이런 그림은 높은 실용성을 갖고 있다고 본다. 왜냐하면 이 그림의 선전문구만을 바꿔도 김일성의 주체사상을 계속 선전할 수 있기 때문이다.
북한 가이드의 설명에 따르면 숫자 '21'의 뜻은 '21세기 태양 김정일 장군 만세'라는 의미다.
개성의 도로 주변에도 여러 색의 정치표어나 주체사상 기념비를 많이 볼 수 있었다.
북한 광복절 전날, 길거리에는 수많은 북한 인공기가 게양되어 있었다.
가운데 그림은 백두산 천지(天池)다. 양쪽의 붉은 꽃은 '김정일 꽃'이라고 부른다. 이 꽃은 평양시내 곳곳에 찬란하게 피어 있었다.
외국인 관광객이나 외빈들이 평양에 오면 대부분 외국인 전용 특급호텔인 양각도 호텔에 묵게 된다. 양각도 호텔은 평양시내와 다리 하나로 연결돼 있다. 이 호텔은 47층 규모의 빌딩으로 안에 있는 시설은 모두 최고급이다. 서점, 매점, 우체국, 사우나, 노래방 등 여러 가지의 시설이 갖춰져 있다.
호텔 서점에서는 주체사상에 대한 엽서를 팔고 있었다. 양각도 호텔에 있는 평양타임즈.
이 곳에 있는 주체사상에 관한 책과 김일성 작품집은 외국인들에게 선전하기 위한 목적이기 때문에 모두 영어로 되어 있었다. 책을 조금 읽어봤는데 중국식 영어보다 표현이 더 이상했다. 중국과 북한은 모두 영국식 영어를 쓴다.
북한 체제를 선전하는 영상물.
서점 안에는 선전 영상을 방송하는 텔레비전도 있었다. 화면을 봤을 때 (중국의) 혁명극과 비슷한 형식으로 만들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호텔의 지하 1층에는 카지노가 있었다. 이 곳에서는 중국어와 영어로만 서비스가 이뤄졌고, 일반 북한 주민들은 올 수 없는 장소였다. 북한에 와서야 처음으로 카지노에 오게 됐다. 같이 온 친구들은 이 곳에서 몇 백 달러씩 돈을 잃었다.
출입구 양쪽에는 슬롯머신 기계가 많이 있었다.
조선중앙방송 화면이다. (중국에서도) 유명한 이 북한 여성은 항상 격정이 넘치는 목소리로 보도를 했다. 그리고 취재 화면이 나올 때 카메라는 취재 대상만 보여줬고, 하단에는 검은색 마이크만 보였다. 혹시 취재기자가 화면에 나오면 안 되는 이유가 있는지 금궁했다.
북한 말을 이해는 못하지만 화면을 보니 무슨 뜻이지 대충 알 수 있었다. 첫 번째 뉴스에서는 탄광의 생산량 증가를 소개하는 화면이 나오면서 아나운서가 흥분된 어조로 기사를 읽었다. 두 번째 뉴스에서는 제철소가 등장했는데, 탄광을 보도하는 것과 비슷하게 아나운서의 목소리가 고조돼 있었다.
간단명료하게 보도되고 있는 일기예보다. 어느 지역의 날씨를 보도하면 그 지명만 파란색으로 변했다.
북한에 가기 전에 친구들은 내가 북한에서 배불리 먹지 못하게 될 것이라고 걱정했다. 그리고 장시간 기차를 탔을 때는 배가 정말 많이 고팠다. 그런데 막상 북한에 와 보니 식사시간마다 잘 자차려진 음식을 먹을 수 있었다. 이 사진은 양각도 호텔의 저녁 식탁 모습이다.
아침은 뷔페식이다. 빵이나 중국식 찐빵 등 여러 종류의 음식이 있었다. 그리고 죽, 음료수, 중국식 두유, 우유 등도 있었다. 그런데 북한의 우유는 분유로 만들어져서인지 맛이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묘향산에 갔을 때 점심이다. 우리는 4일 동안 계속 명태를 먹었다.
북한식 신선로(火&-#38149;)이다. 국물이 너무 싱거워서 내가 아무리 조미료를 많이 넣어도 맛이 변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양은 충분했다.
개성에서의 점심 식사 사진이다. 한 명당 반찬이 9개씩 놓아졌고, 국물 그릇도 따로 있었다. 그릇이 금빛으로 반짝여서 풍요로운 국가라는 착각이 들기도 했지만, 우리는 곧 이 착각에서 벗어나게 됐다.
우리가 식사를 시작하자마자 북한 가이드는 모습을 감췄고, 식사가 끝난 후에야 다시 돌아왔다. 북한 가이드가 돌아 왔을 때 우리가 "무엇을 먹었냐?"고 물어봤더니 북한 가이드는 제대로 답하지 못한 채 화제를 바꿨다. 그 후에 어떤 관광객이 몰래 식빵을 가져가 북한 가이드한테 나눠 주는 일이 있었다고 들었다.
-
외국 여행을 할 때면 항상 현지의 대중교통을 체험하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대중 교통을 이용하게 되면 그 나라 특유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평양 지하철을 한 정거장만 타보기도 했지만 평양 시내를 달리는 전차를 봤을 때도 한번 타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북한여행 첫째 날에는 비가 왔지만 둘째 날이 되자 날이 개었다. 그 덕분에 저녁에는 아름다운 노을도 볼 수 있었다. 하늘과 맞닿은 듯이 보이는 맨 끝의 건물이 바로 유경호텔이다. 유경호텔은 한동안 공사가 중단되기도 했지만 2012년 완공을 목표로 다시 공사가 시작됐다고 들었다.
평화로워 보이는 대동강의 모습
대동강 옆에 있는 김일성 광장
김일성 동상 앞에서 참배를 하고 있는 북한 주민들. 개별적으로 온 주민들은 아니고 어느 단위에서 단체로 참배를 온 듯했다.
높이가 170m에 달하는 주체사상탑이다. 천리마 속도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한다.
주체사상탑 아래에 서 있던 북한 사람들이다. 이들은 3대에 걸쳐 똑같은 삶을 살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진을 찍고 있을 때 한 아이가 우리를 계속 쳐다보고 있었다.
평양에서 자주 볼 수 있는 거리의 풍경이다. 높은 건물이 많이 있지만, 자세히 보면 건물색만 다를 뿐 모양은 비슷했다. 북한 사람들은 모두 같은 건물에서 생활하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마침 북한의 광복절이었기 때문에 길거리에는 많은 인공기가 게양돼 있었다.
항미원조기념비 지하실의 천장. 이 곳에는 한국전쟁 당시 전사자 명단이 있다.
북한의 이발소를 밖에서 촬영한 것이다. 중국의 일부 지역에서도 이러한 옛날식의 이발소를 볼 수 있다. 이 장면을 봤을 때 정말 과거로 시간이 다시 돌아간 듯한 느낌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