核물리학자 이휘소 박사와 朴正熙 이휘소 박사의 한국 核개발 참여 과정
세계적인 핵물리학자 이휘소박사... 10년 전에 읽었던 책을 다시 읽게 되는 계기에 새삼 이휘소박사를 다시 생각해 보면서, 너무 아까운 인재에 가슴이 아리기도 한다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의 주인공...
경기고교 2학년 재학중 검정고시를 거쳐 서울대 수석 합격 화공과 2학년 재학중 도미, 마이야미대학물리과로 편입, 피츠퍽대학 석사, 펜실바니아대학에서 박사학위 취득,27세에 프린스톤연구소 위원, 그 당시 미국에서 10명에 꼽히는 물리학자가 되었고, 페르미연구소 물리부장으로 취임 명실공히 세계 핵물리학자중 1인자로 부상했다 74년에 방한, 서울대에 AID 차관에 의한 과학연구소를 설립해 주었으며, 조국에 장거리 유도탄과 핵무기개발원리를 제공하고 같은 해 의문의 죽음을 당했다 1962년 국제 고에너지회의에 미국대표로 참석할 정도의 이휘소박사는 미국을 대표하는 핵 과학자 10명속에 포함 되었다 외국인으로 거기에 든 예는 과거에 없었고, 아직 국적이 "한국인"으로 되어 있는데 거기에 포함된 것은 특별한 예외에 속한 것이었다 국제 고에너지회의는 이탈리아의 프리에스트에서 7월 15일부터 45일간 계속되었는데 미국의 핵 과학자 10명이 거의 행사를 주도하였다 회의의 중심 과제가 되었다 회의에 참석한 백 여명의 학자중 이휘소가 가장 젊었다 당시 이휘소는 핵의 이론과 소립자의 단위와 그들의 생명의 기간 강연을 했고, 세계 석학 전원의 열렬한 박수를 받았다
박수가 끝나자 이휘소는..."저는 미국 국민이 아직 아닙니다 미국에 유학중인 사람입니다 제가 국적을 언제인가 옮길 줄은 모릅니다만, 핵을 만들고 핵을 이용하는 것은 일부 강대국의 전유물이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핵을 저개발국가의 복지에도 혜택을 주어야 합니다 감사합니다." 이휘소의 이 말에 모두 또 감격했다 회의에 참석한 전원이 기립박수를 하였다 기립박수를 받은 사람은 젊은 이휘소 한 사람뿐이었다 펜실베니아 대학에서 보는 박사학위 시험결과도 전체 평균 93점이었고, 고아인쉬타인박사가 일하던 곳의 프리스톤 고등연구소의 프레이즈 박사가 찾아와 대담을 요청할 정도였다 귀하의 성적은 펜실베니아대학뿐만 아니라,전 미국의 물리과 박사학위 지망생 중에서 역사 이래 가장 뛰어난 성적이라는게 특히 귀하의 시험지를 검토한 결과 새로운 이론의 전개나 학설까지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 본 연구소의 검토결론입니다 프레이즈박사는 정중히 이휘소를 연구소에 꼭 필요한 사람이라고 초빙 하면서, 귀하를 만난 것이 영광입니다 이휘소는 1960년 1월 프리스톤의 정연구원으로 들어갔다
핵을 개발하기 위해서는, 우리나라에 꼭 필요했던 이 휘소박사,
< 이휘소박사님, 안녕하십니까?
본인은 언제까지 대통령직에 있지는 않을 것입니다
언제 공산화가 될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이미 미군철수가 시작되었습니다
지상군 17000명이 철수를 시작했습니다 좋다는 전제의 신호이기도 합니다 이것은 시간문제입니다 본인도 미국정부측에 몇 번 자제를 호소하고, 부탁도 하여 보았지만,더 이상 구걸하는 것도 추한 꼴이 되었습니다 이제 더 이상 초라한 모습을 보이기도 무엇하지만, 본인은 어떠한 일이라도 할각오입니다
이미 지났습니다 가능성도 없는 구걸 행각으로 국가의 이미지만
저는 독자적으로 유도탄 개발과 핵무기개발을 추진하고 있었습니다 재미과학자들을 본국에 초청한 것이나 귀국시킨 것도 이런 저의 뜻을 일부입니다 미국에 선전포고를 하는 결과나 마찬가지라는 중론에 못이기어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한국 사람이라는 사실에 무한한 자부심과 긍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지금, 그러나 조국은 위태로와 졌고 사정은 급박하여 졌습니다
묘한 도덕정치를 하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이제는 의존하던 시대에 종막을 고할 때라고 사료됩니다
이박사께서 도와주셔야겠습니다
74년엔가 박사님을 처음 뵈었을 때 저는 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지금도 진심입니다우리 민족이 사느냐 죽느냐 하는 문제는 지금 이박사의 마음에 달리어 있습니다 그 동안 재미물리학자들의 협력을 얻어 미사일개발부터 서둘렸고, 지금은 이박사님의 힘이 필요할 때입니다 그러나 박사님께서도 조국이 공산화되는 것을 이박사님께서 조국을 위해, 한 번 일어서 주십시오 언제 어떻게 될 지 모르는 절대 위기의 상황에서 감히 이렇게 박사님께 애원합니다 박사님의 건강과 가운이 길이 빛나기를 엎드려 비옵니다.>
편지는 이렇게 끝나 있었다
이휘소는 그날 (1977.3.20) 일기를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 박정희 대통령께서 나에게 편지를 보내왔다 내가 핵을 공부하고 연구한 것은 처음에는 적성에 맞기 때문이었다 핵에너지를 이용한 자원의 개발, 자원의 새로운 창조는 무한히 열리어 있다 나는 지금까지 여기에 내 생애를 바치었다 또 앞으로도 그러고 싶다 그러나 조국이 공산화되거나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 처할 위험에 처하고 있다고 가정하자 아니, 지금 조국이 내가 겪은 6.25나 그보다 더한 비극의 문턱에 있다고 판단되었을때,내가 조국을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미국은 월남에서 손을 떼었고, 또 한국에서도 손을 떼고 있다 미군철수...조국의 공산화... 이런 것을 보면서 핵을 자원의 개발에만 목적을 두었던 나의 신념이 흔들린다면...그것은 잘못된 판단일까?
조국에게 내가 할 수 있는 핵개발의 원리를 제공한다면... 그것이 조국을 지키게 하는 힘이 된다면... 나를 낳고 나를 길러준조국의 현실을 내가 배반할 수는 없는 것이 아닌가?...
조국은 나에게 너는 너의 능력을 이때에 쓰지 않으면 너는 평생을 후회할 것이라고 말하는 것인가?
무엇이 참다운 삶이고
++++ 박대통령의 두번째 편지...
미국은 저나 한국정부에 한 마디 상의도 없이 미사일부대 완전철수에 이어
박사님이 한국에 계시다면, 미국은 그렇게 함부로 하지는 못합니다
1977년 4월 8일 대한민국대통령 박 정 희 배상
4월 8일 하바드대학특강. 5월 20일 동경제대학술회의 참가등이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완성단계에 있는 "히고스입자에 미치는 강작용의 영향"이란 방대한 논문도 며칠내로 마쳐야 한다
하버드대학에서의 특강을 끝내었다 그리고 그는 조용한 마음으로 5월의 동경대학에서 있을 학술회의를 기다렸다
1977년 5월 15일, 이휘소는 시카고 변두리에서 외과의 개업을 하고 있는 김박사를 찾아갔다
이휘소는 김박사에게..."사실은...의논을 드릴 것이 있습니다 이휘소는 김박사에게 솔직히 그 동안의 상황을 털어 놓았다
북한은 소련에서 수입한 사정거리 50Km가 되는 미사일을 자체적으로 보유하고 있었다 50Km라면 휴전선에서 서울은 물론 수원 인천까지 미치는 거리다 휴전선에서 한강다리 전부를 파괴하는데 걸리는 시간은 1분이다 미군은 한국에서 철수를 이미 시작했고 다시 미국에 사정하고 애걸하는 것은 한국정부에서도 할 일이 아니며, 그런 꼴을 이휘소도 보고 싶지 않다
과학자들에게 주한미군철수정책을 시정하여 달라고 편지도 하고 전화도 하고 찾아다니기도 한 나로서도 다시 그럴 수는 없다
"박사님이 완벽하게 처리하여 주십시오." 김박사는 침통하게 이휘소를 바라보았다.
항상 교포사이에는 긍지와 자랑이었다
이휘소는 집으로 돌아왔다 이휘소가 발표한"히고스입자에 미치는 강작용의 영향"은 물리학계에 또 다른 파문을 일으키었다
극찬했고, 세계의 핵과학자들은 다투어 이휘소의 논문을 구하려고 하였다
정리하고는 한국 청와대에 전문을 쳤다 ............."5월 21일 PM11시 정각 나리다공항 대기".....
나리다공항 KAL 안내소에는 몇 명의 안내원이 대기하고 있었다
헬리콥터에 올랐다 헬기는 청와대정원에 내려 앉았다 박대통령이 밖에 나와 기다리고 있었다 "고맙소, 이박사" 박대통령은 이휘소의 손을 잡고 눈물을 글썽이었다
의사 두 사람의 집도로 수술이 시작되었다. 수술은 간단히 끝났다
박대통령은 이휘소의 다리 속에서 빼어낸 겉에는 피가 번진 문서를 받고...
이휘소는 바로 헬기를 탔고, 또 지체없이 비행기에 올랐다
==== 가장 충실한 교수로서,그는 미국과학계에서 가장 능력있고 존경받는 인물로 공인되어 있었다 가정에서도 그는 더욱 철저하게 아내 마르안느(중국계 말레이지아 태생인 미국인), 아들 천, 딸 안에게 정성을 다 했다 1977년 6월16일 콜로라도주에 있는 국립과학연구소에서 초청강의가 있었다 가족과 함께 간단한 식사를 마치고 아내와 아들, 딸을 뒤에 앉히고 천천히 차를 몰았다
시카고교외를 지나 일이노이주에 진입하였을때, 이휘소의 차 정면으로 돌진하였다
이휘소는 천천히 브레이크를 밟았다 이휘소의 차는 주행선에 있었기 때문에 중앙선을 넘어 오더라도 여유가 있었다 그러나 트럭은 100m나 되는데서부터 정면으로 이휘소의 차를 향하여 돌진하였다 차의 앞머리가 부서지고 이휘소는 쓰러지고... 상대방 흑인의 운전솜씨가 의도적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FBI, CIA에서 페르미연구소장에게 긴급전화가 걸려왔다 "이휘소 교통사고로 사망...상대는 50대 후반의 흑인...도주했음"
FBI, CIA 요원이 삽시간에 주위 400km의 도로를 감쌌다 아니 어떻게 부딪쳤으며 어디가 어떻게 손상되어 죽었는지 조차 발표하여 주지 않았다 "이휘소 사망..."UPI, AP, 로이터 통신으로 세계 언론계와 각국 대사관으로 속속 전달되었다 밤 11시 30분 청와대 대통령 집무실에 있는 긴급 벨이 울리었다 "이휘소 사망..." 박대통령은 전화 속에서 들리는 소리를 듣고 전화통을 창 밖으로 내던져 버렸다
아! 죽음을 각오하고 말없이 다리 속에 숨겨온 피투성이의 메모지를 넘겨 주던 이휘소...
그리고 국내에 있는 미국놈들을 전원 쫓아 버려... "무슨 일이있어도 그렇게 해... OOO들... "이휘소가 죽었습니까? 각하..." "죽은게 아냐 죽였지" "누가 죽였습니까?" "미국이 그랬지, 그 새끼들 청와대를 24시간 도청하지를 않나?" "이휘소는 미국 CIA에서만 24시간 감시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니, 설령 미국에서 죽이지 않았더라도 그리고 눈앞에 있는 범인도 안 잡았다는 거야..." "미국대사께서 온다고 전화가 왔습니다."
그리고 내일 아침 내가 직접 미국에 항의하는 성명서를 발표하겠네" 이튼날 박대통령은 직접 나타나 미국 대사를 불러 항의하고,
주권국가로 한국을 대접하는 것도 아니고 전정한 우방으로 대우하지도 않는다 우리는 다시 미국에 애걸하지도 않겠거니와 미국과 국방까지도 협상하지 않겠다" 국방까지도 협상하지 않겠다는 박대통령의 발언은 비상한 충격을 주었다
노벨상을 타고 죽는건데... 이휘소가 의문의 죽음을 당한 두 달 후에 박대통령은 보국훈장을 수여했다 수상식에는 이휘소를 대신하여 이휘소의 어머니가 받았다
"참 훌륭한 분이었는데...너무 훌륭한 분이었는데...너무 아까운 분이었는데..." 라고 말하며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닦았다 이휘소가 박대통령에게 유도탄 및 핵제조개발원리를 넘겨주고
핵관리의 엄격한 체제구축, 우방국에 대하여 한국과의 핵협정 파기 등을 "한국은 인권탄압을 중지하고, 긴급조치를 즉각 해제하고,
한 마디 상의도 없이 주한미군을 데려가는 사람과 대화하고 싶지 않다 카-터는 근본적으로 도덕성이 결여된 사람으로서 도덕정치를 하는 사람이다" 라고 응수했다
만들지못하게 하는 것이니, 패권주의 사상에서나 가능한 발상이다." 박대통령의 이러한 발언은 카-터에게도 충격적인 것이었다
그리고 핵무기개발을 중단하지 않으면 2억9천2백만달러의 미수출입은행 차관약정을 파기하겠다."라고 응수했다
이러한 한미간의 대립은 박대통령에게 유도탄개발과 핵개발에 더욱 박차를 가하게 했다 박대통령이 하도 야단이니까 한 측근이 핵공장을 비밀리에 만들수 있는 아이디어를 제공하자
매일아침과 저녁으로 직접 전화로 확인하고, 일주일에 한두 번은 예고없이 들리어 연구원들과 종사자들을 격려했다 박대통령의 집념은 눈물겨울 정도였다
이휘소의영상을 더듬었다 다리를 베고, 뼈 속에서 메모지를 내 주던 모습... 그 피투성이의 메모지를 받아 들고 감격하였던 대통령 자신의 모습... 이휘소가 차에 깔려 죽는 영상...
박대통은 이제 이휘소의영혼을 위해서라도 이휘소가 내어 준 메모지대로는 다 실험을 거쳐야 할 책임을느끼었다
의해서 진행되고 있었지만, 박대통령의 열성에 감격한 과학자들과 600여명 직원의협조에 의하여 해결되곤 하였다
핵분열물질의 생산과 핵탄두의 운반체 개발 등이문제였다
연구실의 분위기는 벼란간 달라졌다고 한다 감탄했다
1978년 8월 26일 @@기지에서 한국국방과학연구소와 한국핵연료개발공단과 공동제작한 중장거리 유도탄발사 실험이 있었다 과거에 몇 번씩 실패한 경험이 있는 박대통령의 심정이나 과기처장관, 첫 번째 대전차로켓 (3.3인치 로켓을 다시 개발) 실험은 성공이었다 두 번째 다연발로켓 (28연발 사정거리 20km) 실험도 성공이었다 세 번째 중거리로켓 (사정거리 50km) 실험발사도 성공이었다
사정거리 150km, 유효사거리 350km로 북한 전역은 물론 이 성능은 미국이 개발한 최신 장거리유도탄 나이키미사일보다 성능이 우수한 것이기도 하다 이것을 외국의 도움없이 독자적으로 개발한 것이다 그것도 세계에서 가장 성능이 좋은 장거리유도탄을 순수한 우리의 기술로 개발한 것이다
너무 감격하고 있는 박대통령을 바라보던 과기처장관, 국방장관, 관계 과학자들도눈시울이 붉어졌다
경제나 모든 것에 미국에 이끌려다니지 않는, 세계와 어깨를 나란히하는 대한민국이 되어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에 가슴이 답답하다 ===
중구, 일본, 홍콩, 프랑스에서도 해설과 우려를 표명하였다
박대통령에게 강력한 압력을 가하기 시작했다
박대통령은 집무실에 앉아 몇 번이고 독백을 다짐했다 "이제, 이휘소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하여도 중단할 수 없다.
죽을으로써자립의 기틀을 우리에게 남긴 것이다." 박대통령은 이휘소를 생각할 때마다 새로운 용기와 결의를 다짐했다 카-터는 한국에서 일어나는 이러한 상황에 강렬한 쐐기를 박기 위하여 일본에서 있었던 선진7개국 정상회담에 참석하고 온 것이다 도착성명도 없이밤8시 56분에 트랙에서 내리자 헬기로 동두천에 있는 주한미군사단병영으로 날아가 버렸다
이것은 박대통령이나 한국이라는 나라 자체를 무시한 행동으로 보였다 6월 30일 청와대를 방문한 카-터는 인권탄압완화, 긴급조치해제,
"한국의 독자적인 핵무기개발은 세계 핵확산금지법에도 저촉되는 것이 아닌가?" "당신의 국가, 미국은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으면서, 패권주의 발상이 아닌가?"
극비의 긴박한 지시를 내리는 분위기다
소련의 태평양군사력증강 등을 들었으나, 말할 것도 없다
김재규는 정말 미국 CIA요원이였을까? 미국은 김재규를 희생양으로 삼을 것일까?
"박대통령이 핵개발에 대한 집념은 무서웠다. 라고 술회하고 있다
1980년 제5공화국이 들어서면서 원자력연구소와 핵개발공단은 <에너지 연구소>로 과학원과 과학기술연구소는 <과학기술연구원>으로 통합되었다
찾아가 한국핵무기개발중단을 약속하고 댓가로 주한미군의 계속적 주둔을 약속 받고 돌아왔다 그리고 핵무기를 만들기 위하여 준비한 모든 것은 폐기처분하기로 했다
글을 마치면서...
이휘소박사의 어머님을 10여차례 방문하고, 일년여를 지냈습니다 그러는 가운데 저는 어떤 책임감을 느끼었습니다 생각한 것입니다
느꼇습니다 그래서 저는 글을 쓰다가 몇 번 중단했었습니다 다만 전공적인 것은 핵을 전공한 분들이 어느 때인가 정리한다 할지라도
이휘소박사는 말할 것도 없이 20세기가 낳은 세계적인 천재요,
항의 한 마디 제대로 해 보지 못하고 사는 것은 우리 민족의 비극이라고 생각됩니다 이휘소박사는 말로 애국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묵묵히 실천했습니다 이휘소박사는 이론만 내세우지 않았습니다 그는 실험했습니다 어느 것 하나 그는 실천하지 않는 것도 없었고,
앞으로 좀더 치밀한 조사로 보충할 것을 약속 드리며, 덧붙여 이 책의 인세 전액은 이휘소박사추모기념장학재단을 설립하여, 독자 여러분의 적극적 호응을 부탁합니다
편저자 공 석 하 드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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